▲ 종이신문보기

택시를 탔다. 기사는 친절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상냥한 대접을 받으며 택시에 타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나는 친절한 기사의 고요한 운전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치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기사는 갑자기 물었다. "누구 뽑으셨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할 의무가 없다. 기사는 진보 후보를 뽑았다고 말했다. 그의 진보 후보와 내가 생각하는 진보 후보가 같은 사람인지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나는 그가 누구를 뽑았는지 알아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다. 하지만 그는 보수 후보가 대통령이 된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 같은 서민들이 잘살 수 있겠느냐며 계속 정치적 의견을 물었다. 나는 의례적으로 "정말요. 진짜요. 그런가요" 삼종 세트를 반복했다.

택시는 서촌에 진입했다. 내비를 보니 목적지는 골목 많기로 유명한 서촌에서도 제법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 헤매던 기사는 낯선 골목 초입에서 차를 세우고 친절하게 단언했다. "여기서부터는 차가 못 갈 것 같은데요 손님." 그도 초행이지만 나도 초행인 길이다. 들어가 보기도 전에 못 들어갈 것 같은 길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기분이 상했지만 내리기로 했다. 그는 네이팜탄처럼 퍼붓는 비를 맞으며 뛸 준비를 하는 나에게 친절한 목소리로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쳤다. 흠뻑 젖은 채 약속 장소까지 뛰어갔다. 작은 트럭도 드나들 만한 골목이었다. 친절한 기사는 가본 적 없는 골목으로 친절하게 차를 몰고 들어가는 일이 귀찮았을 뿐이었던 것이다.

한 인간이 타인에게 진보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진보든 보수든 가장 중요한 의무는 우리 모두를 목적지까지 정확하고 안전하게 데려가는 것이다. 나는 좋은 별점을 달라는 듯 울려대는 택시 앱을 닫았다. 낮은 별점을 주는 것으로 친절한 기사에게 복수할 마음도 접었다. 그건 아마도 지난 몇 달간 내가 행한 가장 친절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기고자 :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005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