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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임덕 어디나 있어 현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우려해야 할 사태는 대통령의 무력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현직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이 가속화하는 동안 우리의 정치 경제 등의 여러 동적 요인들이 정체하거나 후퇴될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노태우대통령은 임기를 11개월,그리고 차기 대통령선거를 8개월 가량 남겨놓고 있다. 그의 대통령 당선후 임기내에 있은 두번의 총선거에서 그의 민자당은 모두 과반수에 미달하는 득표실적을 보였으며 특히 이번 총선에서는 3당 합당에도 불구하고 저조한 실적에 그쳤다.

세계 어느나라 집권자에게도 왕권이 아닌 다음에야 임기만료를 앞둔 레임덕 현상은 있게 마련이다. 멕시코같은 나라는 레임덕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치적 관행으로 일종의 제도화 하는데까지 이르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보다 솔직히 접근하는 태도가 아닌가 여겨지며,어차피 거스른다고 될 일이 아니라면 차라리 수용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라는 견해는 일리가 있다.

한국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정권을 건 대통령선거를 8개월 앞선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대통령이,더더군다나 그가 다음 국회의원 공천이나 선거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있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속에서 무엇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인지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심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우리와 같은 정치풍토 하에서,또는 정치의식 아래서 대통령은 동지보다는 더 많은 적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정치사회는 도덕적 부담같은 것에는 무관심할 정도로 냉혹하다. 그래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또 그 반대도 수없이 있어 왔다.

우리의 민주역사의 일천함에 비해 관료사회의 응집력이랄까 관료적 동일체의식은 턱없이 강하다. 이 관료사회라는 것은 강자에는 강하고 약자에는 등돌려온 속성을 지녀왔다.

이런 요인들을 감안할 때 노 대통령의 정권말기 현상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정주영씨의 정치입문과 국민당의 득세,민주당의 전례없는 신랄한 공격,민자당 내부의 반발과 내분,경제의 정체현상 등은 노 대통령의 파워기반을 흔들어 보는 레임덕 현상의 첨병들이다.

솔직히 3 24총선을 끝낸 뒤의 노 대통령은 총선전의 노 대통령이 아니다. 심지어 노 대통령의 명실상부한 통치기간은 이제 끝났다는 주장들도 과감히 제기되고 있다. 본인의 의지나 의욕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의 말 이 연극의 대사처럼 들리고,그의 근엄한 표정 이 사람들을 미소짓게 만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것은 노 대통령 개인을 위해서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며,정치의 흐름,경제의 지속성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노 대통령으로서 그와 같은 현상의 폭을 최소화하는 길은 있다. 그것은 레임덕 현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영역을 한정하는 것이다.

당총재직 떠나야

그런 의미에서 노 대통령은 먼저 민자당의 총재라는 다른 한개의 모자를 벗는 것이 바람직하다. 민자당의 14대 당선자들은 노 대통령에게 공천이라는 부담은 있을지언정 그 이상의 정치적 부담은 시간이 갈수록 엷어지게 마련이다. 특히 5월 전당대회에서 새로운 후보가 탄생하고 나면 노 대통령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다. 전당대회에서 그만두면 될것 아니냐는 견해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노 대통령은 당총재직을 떠나 초연한 입장에서 후보경선의 이전투구끝에 새로운 승자가 탄생토록하는 것의 중요성과 견주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노 대통령의 후계구도 설정 운운하고 있으나 이제는 그 때가 너무 늦었다.

노 대통령에게 둘째로 바라고 싶은 것은 이제 남북문제건,국제문제건,국내 경제문제건 더이상 무엇을 만들려고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전환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기록될 만한 것들을 성취했다. 오늘의 선거결과를 평가하면서 외국의 신문들이 노 대통령의 민주화 노력의 결과 라고 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된다. 북방정책,남북화해,여러 불합리한 제도의 개선,재벌억제정책 등은 그 문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평가해 줄만하다.

마무리만 하면 된다.

노 대통령은 그대신 미진했던 물가 등 민생문제를 보다 깊이 들여다보고 대통령선거가 가져올지도 모를 경제위기,즉 정책 우선순위의 변동,선심예산의 팽창으로 인한 인플레,추곡가정책 등 시한폭탄적 사안들에 대해 안전장치를 해주는 퇴장 대통령 으로서 손길을 펼 줄 알아야 한다.

미국을 비롯한 구미 여러나라에서 임기를 1년 앞두고는 새로운 사업을 시행하지 않는 것을 정치적 관행으로 삼고 있는 뜻은 대통령직의 정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직의 마무리를 위한 배려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남은 11개월을 나라의 중요한 일들이 멈추거나 후퇴하지 않고 제속도대로 흐르게 도와주는 일-그것은 레임덕 대통령으로서 최대 최고의 애국이 될 것이다.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