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신문보기

한때 순성(巡城·성을 돌며 구경함)을 즐겼던 적이 있다. 총 18.627㎞에 이르는 서울 성곽길을 하루 안에 걷는 것인데 처음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호기롭게 첫발을 내디뎠지만 가파른 경사길은 벅찼고, 도로로 끊어진 길을 이어 걷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완주의 성취감은 있었지만,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정도의 근육통이 여러 날 계속되었다. 뜨거운 여름 태양을 머리에 이고 열세 시간을 걸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첫 도전'의 고통이 사라질 때쯤 사람들은 순성을 놀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잘 놀 수 있을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먼저 내게 맞는 시작점을 찾아야 했다. 장도(壯途)에 오르기 전 몸을 풀기엔 낙산이 안성맞춤이었다. 서울 성곽길 4개 구간 중 경사가 심하지 않고 거리도 가장 짧아 좋았다. 다음은 속도 조절. 처음에야 몸이 가벼우니 날아갈 것 같지만 어설프게 속도를 내다가는 중도 포기하기 십상이다. 꾸준하게 일정한 속도를 유지해야 지치지 않았다. 급격한 체력 저하를 막기 위한 당분 보충도 잊지 말아야 했다. 땀을 많이 흘리니 물도 필요하지만 배만 부르고 다리를 꼬아야 하는 난처함의 주범인 물보다 월등한 것은 진하게 탄 꿀물이었다. 함께 걷는 길동무도 중요했다. 멈추고 싶을 때 할 수 있다고 응원해 주고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주저앉을 때 손을 내밀어 일으켜준 완주의 공로자들이다.

그렇게 성곽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다섯 번이나 완주를 했다. 한 번도 같은 곳에서 시작하지 않았고 계절도 매번 달랐다. 체력적으로 힘든 때도 있었고 순풍에 돛 단 듯 앞으로 쭉쭉 나갈 때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걸었다는 것, 스스로가 대견해 보였다. 걷다 보면 지루하기도 했지만 내겐 드라마가 있었다. '남자친구'(tvN)의 송혜교와 박보검은 낙산 성곽길에서 데이트를 했고, '이태원 클라쓰'(jtbc) 주인공 이름을 따 '박새로이 산책길'이라 불리는 남산 성곽길을 걷기도 했다. 주인공들에게 그곳이 어떤 의미였을지 나만의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얼마 전 친구들을 만나 낙산 성곽길을 걷다 보니 코로나 때문에 미뤄두었던 순성놀이가 그리워졌다. 힘들었지만 끝까지 갔고, 벅찼지만 즐거웠던 시간. 올봄 여섯 번째 순성을 해야겠다. 기고자 :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131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