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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장위1동 주민센터 지하 60㎡ 남짓한 조리실은 매주 월요일 오후면 '백발 세상'이 된다. 일평생 부엌 근처에도 안 가봤을 것 같은 할아버지들이 귀찮고 어려운 요리를 배우겠다며 모여들기 때문이다. 조리대 4개에 6~8명씩 나눠 앉은 이들은 연배가 한참 어린 여성 요리강사의 설명을 진지하게 경청한다.

"집에 메이플시럽이 없으면 물엿을 대신 쓰셔도 됩니다." 김자경(43)씨가 간장에 메이플(단풍나무)시럽을 섞어 고등어조림용 소스를 만드는 요령을 일러주자, 앞치마를 두른 만학도들은 손바닥만한 수첩에 깨알 글씨를 적거나 나눠준 유인물에 밑줄을 그었다.

60~70대 가장(家長)이 대부분인 이들은 성북구가 운영하는 '실버남성 요리교실'의 수강생이다. 오는 4월까지 12주 과정으로, 버섯장조림·고등어조림·삼겹살구이와 김치쌈장 만드는 법 등을 익힌다.

"한번 만들어 보시죠." 설명을 마친 강사의 주문에 앞치마를 두른 수강생 얼굴엔 그늘이 어렸다.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 "순서가 헷갈려, 순서가…."

◆고령화 시대 '홀로 서기'

성북구는 60세 이상 남성만을 위한 실버남성 요리교실을 지난해 10월 처음 두었다. 재료비 8만원에 12주간 간단한 요리나 밑반찬 만드는 법을 일러주는 과정이다. 때론 슬픈 사연들이 노장들을 요리교실에 밀어 넣어, 강의는 뜻밖의 호응을 얻었다.

2기 수강생 최고령인 송춘재(76)씨는 단정한 양복차림으로 출석한다. 라면을 끓여본 적도 드문 그의 요리 도전은 아내(72)의 나빠진 건강에서 시작됐다. 남편과 자녀 넷을 위해 평생 헌신한 아내는 2~3년 전부터 만성신부전증으로 식사 준비를 버거워했다. 각자 독립해 미국으로, 경기도로 흩어진 자식들 손을 빌릴 수는 없었다. 도우미 아주머니를 들이려도 월 160만~170만원 비용이 벅찼다. "아내 몸이 더 나빠지기 전에 나 스스로 음식 장만하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고위직 공무원을 지낸 주철호(가명·67)씨는 2년 전 아내와 사별했다. 미혼인 30대 자녀 둘은 직장 다니느라 외식하기 일쑤였다. 아내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되는 대로 밥을 지어 먹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는 "이왕 먹을 것, 제대로 만들려고 수강등록을 했다"고 말했다.

◆한국판 헌신하는 남편들?

이 교실에는 한국판 '헌신하는 남편들'이 있다. 몇 해 전 일본에서 젊었을 때 가정을 돌보지 않다가 장·노년층에 든 뒤 아내에게 귀찮게 굴며 '젖은 낙엽' 취급받던 남편들이 '(아내에게) 헌신하는 남편들 모임'을 만들어 화제가 됐다. 황혼이혼을 면해보려 애쓰는 그들의 모습은 외신도 여러 차례 탔다.

'황혼이혼을 피하려는' 벼랑 끝 절박함은 아니지만, 가정의 화목을 위해 온 수강생도 많다. 1기에 이어 2기 교실에 재등록한 성북구 상공회의소장 구제남(70)씨는 "가족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는 행복을 맛보고 싶어서" 시작해, 이웃 송인원(64)씨 등 동네 친구들까지 모아 단체로 요리교실에 등록시켰다. "인공조미료 없는 건강식을 아내·자녀에게 해주는 기쁨이 있고, 그날 배운 요리를 소재로 대화하니까 말이 통한다고 마누라가 좋아합디다."

부인(61)과 함께 노모(85)를 모시고 산다는 김시창(66)씨는 "남의 손 안 빌리고 맛있는 걸 먹고 싶었다"고 했다. 김씨는 "부인은 노모를, 며느리는 손자 둘을 돌보느라 바쁜 사정을 잘 안다"며 "집안 식구들 귀찮게 할 것 없이 내 입맛대로 요리해서 친구들과 나눠 먹겠다"고 말했다.

상추 씻으랴 당근 채 썰랴, 설거지하랴 행주로 조리대 훔치랴, 조리실엔 서툴지만 분주한 그들의 움직임이 이어졌다. 요리강사 김씨는 "부엌일이 낯설어 처음엔 뒷짐만 지다가도, 이내 재미를 붙여 집에서 복습하다 전화로 질문하는 분도 계시다"고 말했다.

◆독거인, 끼니 해결이 지상과제

정원 30명인 요리교실은 '필요할 때 스스로 식사준비를 할 수 있게 한다'는 목표를 뒀다. 지난해 1기에 27명이 수료했고, 올해 정원을 초과한 36명이 수강 중이다. 성북구는 지역 내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 구민 47만명의 10%(4만7000명)에 이르고, 그중 배우자를 잃고 홀로 사는 노인만 7000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했다. 특히 아내가 아프거나 별세해 '매일 끼니 때울 걱정하는' 남성 노인이 다수였다. 신항우 성북구 노인복지과장은 "'요리자립'이 필요한 노인을 위해 요리교실을 열었더니, '직접 요리할 때가 왔다'고 여긴 남성들이 반응해 왔다"고 말했다. 구는 실버들의 열정에 화답해 다음 학기엔 반을 2개로 늘리고, 자격증반도 따로 둘 것을 검토 중이다.
기고자 : 김진명 배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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