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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는 4백종 이상의 치즈가 있다. 그런 나라의 국민전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치는 아무도 못한다. " 이렇게 프랑스의 드골은 자기의 실정을 변명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는 경상도김치와 전라도김치 그리고 서울김치와 개성김치의 차이가 분명했다. 지금은 서울의 어느 식당에 가도 대구김치와 전주김치의 차이는 있을망정 서울김치나 개성김치는 없다. 애써 지역을 떠난 구별을 한다면 입에 맞는 김치와 안맞는 김치 두가지 밖에 없다.

사라진 체제대결

그렇다고 해서 정치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뭣을 먹이든 항상 맛있어 하는 사람과 맛없어 하는 사람으로 날카롭게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람들 입맛은 체제와 반체제,민주와 반민주의 두가지로 갈라져 있었다. 이번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이 볼때에는 모두가 다 그저 그렇고 그렇다. 어디를 둘러보나 입에 맞는 정당도 없고,인물도 없다.

정치가 잘 되고 있는 나라에서는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무관심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니까 투표율이 높다는 것은 조금도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며,반가운 일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돌아본 경상도의 여기저기에서 목격한 유권자들의 무관심도 반가운 현상은 아니다.

야당들의 고민

대부분의 유권자들에게 있어 이번 국회의원 선거는 신바람이 나는 선거전도 아니며,탄압을 무릅쓰고 벌어지는 긴장감에 넘치는 싸움도 아니다. 6공은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정부는 아니며,누구이든 무슨 말이든 뒤탈 걱정없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다.

야당들의 고민은 예전처럼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마땅한 정치적 공격목표를 찾아내지 못한데 있다. 선거전략의 미스도 있다. 어느곳에서나 야당후보들은 농민의 희생 과 쌀매입 을 앞세운다.

안먹히는 구호들

그것은 농촌에서는 설득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도시에서는 오히려 역효과만을 낼 뿐이다. 반면에 1백억달러의 적자 는 시골사람들에게는 실감나는 얘기가 아니다.

지난번과 비교할때 선거상황은 크게 달라졌지만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모두 어리둥절해 하고있는 듯이 보인다. 내가 돌아본 경상도의 여기저기서 특히 야측이 판에 박은 구호를 되풀이 외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후보들은 또 한결같이 공약을 남발한다. 그게 공약에 지나지 않다고 깨달을 만큼 유권자들이 성숙해졌다는 사실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뭣보다도 특히 야권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은 이제는 유세장에서의 선동적인 연설로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만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모든 것이 조직의 힘과 당근의 매력으로 움직이는 세태다. 어느 곳에서나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어느 후보가 나에게 이로운가를 제일 먼저 따지고 있다. 그가 군사독재의 앞잡이였든,민주투사였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후보의 관록 을 따지는 것도 그가 내고장에 다리 하나라도 더 놓아주고 취직청탁이라도 들어줄만한가 아닌가를 가리기 위해서일 뿐이다.

민주주의 멀었다.

이처럼 많은 것이 바뀌어도 여전히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아니라 지역구의원을 바라고 있다. 정견발표회에서는 입심좋게 시원한 소리를 하며 사람들을 웃기고 흥분시키는 후보에게 보다 많은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선거는 어디까지나 수의 싸움이다. 그리고 유권자를 결정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여전히 실질적인 이해관계다.

비록 겉으로는 제법 깨끗해진 선거전이기는 하나 돈없이는 넘볼 수 없는 국회의원 자리임에는 변함이 없다. 여를 편드는 관권의 음성적인 입김에도 변함이 없다. 지난주에 경상도 일대를 둘러보면서 과연 우리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는가고 회의를 느끼게 되는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홍사중 본사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