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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연기하며 살지… 빈 무대 위로 수많은 삶이 일렁였다

닫힌 문 너머로 로비는 텅 비었다.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분장실 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공연은 한 시간 전쯤 끝났다고 한다. 배우도, 관객도, 티켓 부스와 안내 데스크를 지키던 직원도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복도에는 의상이 걸린 옷걸이가 늘어서 있고, 분장실 안 배우들 자리마다 공연 소품과 분장 도구가 가지런하다. 연습 내내 뒤적여 손때 묻은 대본들. 등퇴장과 장면의 연결, 동선을 잊지 않으려고 거울 옆에 써 붙여놓은 메모들. 선물받은 꽃다발과 군입거리들.

정적 때문일까. 익숙한 흔적이 낯설다. 이 밤의 빈집 속에서 시간은 멈춘 듯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 내일이면 다시 돌아올 세입자들은 어쩐지 영영 떠나버린 것만 같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그렇게 오래전에 이 무대 위로 지나간 무수한 뜨내기를 생각한다. 헙수룩하고 자지레한 짐들을 짊어지고 또 그렇게 이 빈집에 찾아들, 미래의 유령들을.

극장에서 밤을 지새워보기는 오랜만이다. 지금이야 그럴 일이 없지만 예전에는 더러 극장에서 밤을 새울 때가 있었다. 턱없이 짧은 준비 기간 때문에, 때로는 좀처럼 성에 차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든 해결해보기 위해, 스태프와 배우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밤들. 더러는 객석에 앉아 졸기도 하고 분장실에 모여 앉아 야식을 먹고 가끔 연출 흉도 보다가 부르면 달려 나가 조명 위치를 맞추고 동선을 수정하고 또 한참을 기다리다 겨우 한 장면 서로 맞춰 보고, 누구누구는 당장 연습할 게 없으니 들어가 보라 해도 왠지 미안해서 먼지 자욱한 극장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던 배우들. 그 밤사이 누군가는 서로 눈이 맞기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상처받아 영 떠나기도 하고, 누군가는 우묵한 곳에서 귀신을 보았다고도 했다. 그 귀신들은 외롭고 쓸쓸하고 유쾌한 애들이라서 사람 많이 모이는 극장을 좋아한다고, 그러니 귀신이 출몰한다는 것은 객석이 꽉 들어찰 징조라고. 할 일은 태산인데 날은 또 얼마나 빨리 밝던지. 해장국 한 그릇 먹고 헤어지던 새벽. 돌아보면 굳이 그래야 했을까 싶은, 그 밤의 무리(無理)들.

그런 밤에 글쟁이인 나는 약간 겉도는 신세가 되었는데, 안 그래도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는 마당에 괜히 군소리나 보태어 말썽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되도록 입을 다물고 실없는 농담이나 해가며 어정거리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무대나 객석보다는 극장의 나머지 부분과 친해졌다. 분장실, 무대로 통하는 어둑한 통로와 대기 구역, 그 서늘함이 편안했다. 누구나 짐짓 아닌 척 조금씩 연기하며 살아간다. 배역 없이 익명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장소가 때로 아늑한 이유일 것이다. 가끔은 천장 가까운 캣워크(catwalk)에 몰래 웅크리고 앉아 무대와 객석을 내려다보기도 했는데, 그런 어느 날에는 배우 하나가 귀신을 보았다고 했다. 나는 모르는 척했다.

공연이 올라가고 나서도 나는 객석에 앉아있기보다는 무대 뒤편에서 어슬렁거릴 때가 많았다. 웅웅대는 조명과 무대 장치 사이로 상수(관객이 보기에 무대 오른쪽)와 하수 사이를 오가며, 어둠 속에서 분주하게 들고 나는 배우들과 눈웃음을 주고받으며, 그들이 숨을 가다듬고 다른 존재가 되어 빛 속으로 달려 나가는 모양을 보았고,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오며 낮게 내쉬는 한숨 소리를 들었다. 그 경계를 엿보기를 나는 좋아했다.

빈 무대 위로 그 덧없는 순간들이 희미하게 일렁인다. 운 좋게 이 극장에서도 몇 차례 공연한 적이 있었다. 벌써 10년이 흘렀나. 그 공연을 연출했던 형도, 배우로 출연했던 아내도 이미 병이 깊었다. 그들의 병만큼이나 그 이야기도 지독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격렬한 마지막 장면이 끝나기를 무대 뒤에서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나. 땀에 젖어 무대에서 내려온 아내의 차갑고 축축한 손. 극장의 어둠 속에서 피고 지던 그 세계들, 그 사이를 유영하던 그들은 극장 바깥으로 영영 나가버렸다. 그 부재의 확고함에 비한다면 여기 남은 내가 오히려 허깨비에 가까우리라.

그렇게 극장은 제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허깨비로 만든다. 오직 헛것을 위해 이 육중하고 거대한 집은 비어 있다. 오래도록. 어둠과 침묵 속에서 사라진 것들을 더듬으며,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을 기억하며.

☞극작가 배삼식은?

1970년생. 1998년 데뷔 이래 '허삼관 매혈기' '열하일기만보' '하얀 앵두' '먼 데서 오는 여자' 등 왕성한 작품을 선보이며 국내 대표 극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대산문학상·동아연극상 희곡상·김상열연극상·차범석희곡상을 비롯한 숱한 수상 기록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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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 정상혁 기자
장르 : 연재
본문자수 :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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