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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최초 바카라 CEO
매기 엔리케스
그러던 어느 날, 콘퍼런스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궁금한 게 있어요.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요?"
한 시스템 회사 대표였다. 질문을 받은 매기는 성심성의껏 답변했고, 대표는 그에게 수고비를 지급하려고 했다. 매기가 업무의 연장선이라며 거절하자, 그는 의외의 제안을 했다. "그럼 제가 대신 '경력 계획'을 짜드려도 될까요?"
그 의문의 남자에게 경력 코치를 받은 매기는 어떻게 됐을까? 라틴 아메리카 여성 최초로 프랑스 럭셔리 샴페인 크루그의 CEO를 거쳐, 지난해 프랑스 크리스털 브랜드 바카라의 CEO로 취임했다. 유색 인종 여성이 유럽 럭셔리 브랜드의 수장이 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 그래서 사람들은 '크리스털 천장을 깬 여성'이라고 부른다. 최근 방한한 그녀를 서울 신사동 메종 바카라에서 만났다.
크리스털 천장을 깨다
바카라는 1764년 루이 15세의 지시로 프랑스 로렌 지방에 공방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1823년 프랑스 왕실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제작하면서 프랑스 왕족의 사랑을 받았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 등 세계 왕족들의 주문도 쇄도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모나코의 레니에 왕자와 그레이스 켈리 왕세자빈 등이 팬이었다. 15년 경력 이상의 최고 장인(MOF)들이 수작업으로 제작하는 바카라는 프랑스의 자존심이었다.
―바카라에 합류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취임하기 전에 미리 경영 제안서를 제출했다. 내가 해야 할 업무와 바카라가 가진 가치, 사명 등을 파악했다. 부임하자마자 팀원들과 10년 이상 장기적인 방향을 구상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조사한 건 내부인이 아닌 외부인의 시각이었다. 바카라는 장인들이 운영하는, 장인 정신을 가진 기업이다. 그들과 일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과제를 밀어붙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먼저 그들과 비전을 공유하는 단계가 필요했다. 조직부터 정비했고, 천천히 일을 진행해 나갔다."
―유럽 럭셔리 브랜드는 유색 인종 여성 CEO가 드물기로 유명하다.
"라틴 아메리카 출신은 더 드물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했던 시기에는 많은 여성이 제한된 직장에서 제한된 업무와 지위를 갖고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라틴 아메리카 출신에게 좋은 자리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다. 지금은 인종이나 국적, 종교를 초월해 '하드 워커(hard worker)'를 채용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고 있다. 트렌드가 바뀐 것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일해서는 결코 원하는 자리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목표를 가져야 하고, 투쟁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지금은 유색 인종 여성에게 아주 많은 기회가 열려 있다. 인드라 누이 전 펩시 CEO를 봐라. 그는 인도 여성이지만, 아주 영리했고 똑똑했기 때문에 큰 기회를 얻었다."
―한국은 첫 방문인가?
"네 번째다. 서울은 장인 정신과 혁신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다. 새로운 트렌드에 열려 있고,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즐길 줄 안다."
―최근 한국에서는 바카라 등 럭셔리 그릇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시각도 있다.
"개인의 판단이나 선입견이 있을 거다. 그러나 그릇이 주는 사소한 디테일이 삶에 더 영감을 줄 수도 있다. 좋은 레스토랑이 고급 그릇을 내놓는 것은 손님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그런 레스토랑의 의도에 공감하고 감탄하며 세심함을 느끼는 고객들도 있다. 특히 한국인들은 디테일한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패셔너블한 장인 정신, 제품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정신이 바카라와 일치한다."
―바카라가 가지는 차별점은?
"크리스털 제품은 매우 까다로운 제작 과정을 거친다. 뜨거운 온도를 견뎌야 하고, 1000개가 넘는 크리스털 조각들을 접착제 없이 붙여야 한다. 장인들이 각자 기술에 따라 작업을 세분화하고 공동의 의사 결정 과정을 거쳐 완성한다. 주문 제작 방식 또한 강점이다. 앞으로 우리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향수와 보석을 론칭했고, 뉴욕에 호텔도 개장했다. 2026년에는 두바이에 새 호텔도 선보인다."
경력 계획을 작성하라
어릴 적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하던 매기의 꿈은 수녀였다. 댄서가 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다양한 꿈을 꾸는 그녀를 부모님은 어떤 잣대도 들이대지 않고 응원했다.
―대학 시절 전공은?
"처음엔 화학이었다. 그런데 교수님이 '넌 화학을 하기엔 너무 창의력이 없다'며 정보통신(IT)으로 전과를 권했다."
―엔지니어에서 마케터로도 바꿨다.
"콘퍼런스에서 만난 모 회사 대표에게 도움을 줬더니, 내게 '경력 계획'을 짜주겠다고 하더라. '마술 지팡이를 선물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넌 10년 뒤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뭐라고 답했나?
"계획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10년 뒤 뭐가 되고 싶은지는 꼭 알아야 한다'며 대신 계획을 짜줬다. 마케팅 담당을 거쳐 제너럴 매니저(관리자)로 가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쉽게 되나?
"난 그분께 '마케팅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옮길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마케팅이라는 건 굉장히 상식적인 것'이라며 적어주는 책을 다 읽고 상사에게 하고 싶다고 말하라고 했다. 책 목록에는 '필립 코틀러의 마케팅 원리' 등이 있었다. 난 그가 권해준 책들을 다 읽고 상사에게 갔다."
―상사는 뭐라던가?
"안 된다더라(웃음). 8년 동안 엔지니어였던 직원이 갑자기 마케팅을 한다니, 통할 리가 없었다. '내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난 매주 토요일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마리오네트 공연으로 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난 기획을 하고, 시나리오를 쓰고, 곡을 연주한다. 그래서 나는 이 공연 현장을 사진 찍어 다시 상사를 설득했다. 나에겐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기획 능력도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뒤 마케팅으로 전환됐고, 2년 뒤 마케팅 디렉터가 됐으며, 3년 뒤 제너럴 매니저가 됐다."
세계를 다니는 하드 워커
경영자가 된 매기는 거칠 것이 없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음료 회사를, 멕시코에서는 음식 회사를 경영하며 시장의 변혁을 주도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와인 회사를 운영하며 시장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러다 2009년 크루그 샴페인으로 럭셔리 업계에 입문해 큰 성공을 거둔 후 지난해 바카라 CEO로 부임했다.
―많은 나라, 다양한 회사에서 일했다.
"해외 근무의 어려움이란,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의 문화가 다르고, 프랑스 문화가 다르다. 크루그 경영을 위해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당시 난 프랑스어를 지금의 30%도 못했다. 두 번째는 회사가 겪고 있는 저성장 위기였다."
―어떻게 극복했나?
"럭셔리 브랜드가 성공하려면 존재 이유와 가치가 분명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회사의 뿌리'다. 창업자의 철학을 알기 위해 조셉 크루그가 남긴 일기장을 읽었다. 나무 상자 속에서 6대째 내려오던 검붉은 체리빛 노트에는 그의 생각이 오롯했다. 보통 좋은 샴페인이라고 하면 작황이 좋은 해 생산된 '빈티지 샴페인'이다. 전체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논빈티지 샴페인'은 고급으로 치지 않는다. 그는 일기장에 '왜 최상급 샴페인을 얻으려면 수년을 기다려야 할까? 왜 해마다 좋은 논빈티지 샴페인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할까?'라고 적었다. 그래서 난 10여 가지 빈티지에서 나온 120여 가지 와인을 블렌딩한 다음 6년 이상 숙성한 고급 논빈티지 샴페인 '크루그 그랑 퀴베'를 출시했다."
―일과 가정의 균형은?
"두 아들과 네 손자가 있다. 가족은 내 인생의 기쁨이지만, 내 직업에도 굉장한 만족감을 갖고 있다. 아이들이 소중하긴 하지만, 그들이 내 인생 전부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난 직장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 일을 해야만 행복한 삶을 보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2000년쯤 둘째 아들이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회사와 협상을 통해 12개월 동안 유급 휴가를 받으며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어떤 직장이든 너무 의존할 필요가 없고, 자녀에게도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다. 매 순간 우선순위를 잘 정한다면, 양쪽 모두 성공할 수 있는 '자유 티켓'을 받을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뿌듯했을 때는?
"먼저, 힘들게 박사 학위 과정을 수료했을 때. 정말 많은 조사를 했고, 결코 끝내지 못할 것 같은 양이었는데, 그걸 완성했을 때 가장 뿌듯했다. 논문 주제는 '위기를 기회로 탈바꿈한 경험'이었다. 두 번째는, 크루그에서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더 높은 성과를 거뒀을 때. 세 번째는 바카라에 스카우트됐을 때. 당시 남동생이 말하더라. '이 일은 네 삶이 온전히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이자 평생의 성과가 될 것'이라고." 기고자 : 이혜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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