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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만한 상태를 유지해오던 한일관계가 정신대 파문 이후 최근 급속히 냉각되어 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국제환경 속에서 과거 역사의 청산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한일관계의 문제점과 갈등 해소방안,앞으로의 지향점 등을 전문가 좌담을 통해 분석해본다. 좌담회에는 권병현 외무부 본부대사,조규하 전경련 전무,최상용 고대 교수가 참석했다. <편집자주>

친한서 혐한으로 선회

최=미야자와 일본총리의 방한을 전후해 터져나온 정신대 파문이 한일관계를 최근 미묘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형식적인 사과에 분노하고 있고 일본은 다 끝난 얘기를 왜 또 되풀이 하느냐는 식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죠. 극도로 악화된 우리나라 분위기 못지 않게 일본의 분위기도 요즘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최근 친한파를 자칭하는 일본 지식인들은 일본사회에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는 혐한 분위기에 우려를 표시하며 이것이 장차 반한 분위기로 연결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문예춘추,제군 등의 일본잡지에 등장한 극우파 지식인들은 "한국은 골치아픈 나라" 운운하며 "한국은 이제 일본에 응석을 그만 부려라" "정신대 배상은 한국정부에 받아라"는 식의 방자한 발언을 일삼고 있습니다.

조=과거의 한 맺힌 한일관계사를 들여다보면 일본은 한국에 있어 원수같은 나라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에 엄청난 불행을 안겨준 일본을 우리가 흔쾌히 용서하기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더구나 일본은 지금까지 단 한반도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 대해 솔직하게 반성한 일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미야자와 방한 직전에 밝혀진 구 일본제국 정부의 정신대 직접관여 증거자료들은 한국인들의 감정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특히 국민학생까지 종군위안부로 끌고나간 만행이 처음 밝혀짐으로써 반일 감정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최=정신대징용 노무징용 강제징병 등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아픈 상처는 피해자의 입장 또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볼때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본이 자신들이 저지른 비행을 애써 외면하고 또 잊으려고 한대도 우리가 당한 고통은 결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국가이익을 냉철히 생각해 볼때 이성적인 대응자세가 무엇보다 긴요합니다.

일본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한국은 일본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는 식의 선입관을 한일 양국민들이 갖게 된다면 양국관계가 결코 잘 풀릴수가 없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이미지 를 서로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상호존중을 전제로 한 새로운 선린우호관계의 정립이 시급한 시점입니다.

권=미야자와 총리의 한국방문은 상당히 큰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인데 갑자기 터져나온 정신대 파문으로 그 의미가 크게 퇴색해 버렸던 듯 싶습니다. 과거 역대 일본 총리들은 취임후 첫 방문지로 미국을 택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미야자와 총리는 이례적으로 한국을 택해 한반도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직접적으로 표명했습니다.

정신대에 묻혀 별로 빛이 나지 않았습니다만 당시 양국 정상들은 한일 경제협력,북한 핵사찰유도 등 양국 현안들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를 가졌습니다. 정신대 문제의 경우도 양국 정부가 실무반을 편성해 실태조사를 벌이기로 합의했으며 현재 이 조사가 양국정부 주관아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잘못은 당연히 질타해야겠지만 미야자와 총리의 한일관계 개선노력은 높이 평가해줘야 한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일, 법적 종결 주장팽배

조=일본이 우리에게 도도하게 나오는 것은 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5 16 주체세력들이 경협자금에 눈이 팔려 식민 통치기간의 명확한 피해보상 요구를 흐물흐물 넘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후 새로운 피해사례가 밝혀져도 일본은 기본조약으로 모든 피해보상이 끝났다고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도덕적 권리 를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면 일본은 법적 종결 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적종결 논리를 앞장서서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국내에는 친한파로 알려진 일단의 우파 정치인과 지식인들입니다. 친한파들이기에 앞서 그들은 먼저 철저한 일본파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본적 정의감을 앞세운 일부 일본 지식인들의 잇단 반한 발언은 매우 불쾌한 것이며 복잡한 한일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권=21세기를 진정한 한일동반자 시대로 만들려면 미래 지향적인 사고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말해 일본이 가진 현실적인 힘과 국제무대에서의 역할증대 추세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청산 문제에만 매달릴때 우리가 얻는 국가이익은 그만큼 축소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일본도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에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은 2차대전중 주변국에 저지른 잔혹행위를 반성하는데 솔직하지 못하다. 일본의 자기반성은 일본의 주변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의심을 지우는데도 필요하다"고 말한 이광요 전 싱가포르 총리의 지적을 일본은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최=발전적인 한일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양국이 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 대외관계,경제협력,한반도 통일 등 크게 세가지 분야에서 일본의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중 특히 미묘한 문제는 통일부분입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은 통일된 한국을 원하지 않는다"는 통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일된 한국이 일본에 대해 우호적이라는 전제만 성립된다면,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 제 느낌입니다.

문제는 그 전제에 대해 일본인들이 확신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점입니다. "과거에 대해 응어리를 지니고 있는 한국인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까"하고 우려하고 있는 것이죠. 일본이 한국에 대해 갖는 전략적 목표 역시 세가지 정도로 요약됩니다. 일본에 적대적인 정권이 한반도에 들어서지 않을 것. 일본 이외의 나라가 한반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지 않을 것. 한반도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고수할 것 등입니다.

조=일본보다 심리적인 우위에 서려면 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대일 반박논리를 정립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논리 없이는 일본정부 일본지식인들을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협조를 얻어야할 쪽은 한국입니다. "왜 우리를 계속 비난하는 한국에 협조해야 하는가"라는 회의론이 일본 정재계의 주조를 이루게 만들어서는 곤란합니다.

일본이 과거에 잘못했으니까 반성하는 의미에서 한국에 협조해야 한다는 논리에 일본인들이 결코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일본을 이길 수 있도록 죽기살기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국민들은 일본에 절대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일을 하겠다 는 자세를 갖춰야 하고 기업들은 기술개발에서 일본기업을 끝내 물리치고야 말겠다 는 독한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실제로는 일본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방향을 선호하면서,말로만 일본의 주인노릇을 하겠다는 태도는 자기분열증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일외교 여론의존 곤란

최=한일간의 뿌리깊은 감정의 응어리 때문에 조절이 어려운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정부가 대일외교 문제에 있어 여론에 밀려다닌다는 인상을 줍니다. 정부는 한차원 높은 곳에서 국민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결국 대외문제에 있어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개념이 설정돼 있지 않기 때문에 국가이익보다는 국민감정에 의해 휩쓸리게 되는게 아닌가 합니다. 언론도 여론에 휩쓸려 무게중심을 잃지말고 욕을 먹더라도 진정한 국가이익이 무엇인지를 국민에게 짚어주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권=한일관계의 장래를 승패의 논리속에서 재단하려는 것은 슬기롭지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근본적으로는 한 뿌리를 지니고 있고 같은 토양에서 자라난 만큼,한나라가 잘되면 이웃나라도 발전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작은 것은 경쟁하되 큰길 은 같이 간다는 대국적인 자세가 요청되는 시점입니다. 21세기 한일관계 정립에서 요구되는 발상의 전환도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 도출돼야 합니다.

과거를 말끔하게 청산하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말하지만,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일간의 과거문제는 발전적인 차원에서 일단 접어두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일-북한수교 교섭이 추진되고 연내에 일본 국왕이 중국을 방문할 예정으로 있는 등 우리가 주춤거리는 사이 동남아 정치구도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조=일본은 경제협력이라고 말하면서 무슨 큰 시혜나 베푸는 듯이 행세합니다. 그러나 일본이 지금까지 무상으로 준 순수원조는 3억달러에 불과합니다. 자국의 원료나 기계를 팔기 위해 우리에게 제공한 차관 등에 대해 우리가 고마워하거나 부채를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일본의 대한협력은 경제적인 이익에 바탕을 둔 것이고 따라서 경제적 이익이 사라질때 일본의 협력도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경제력을 키우는 것이 바로 일본에 이기는 것이며 궁극적인 극일에 이르는 길입니다. 또 동서냉전 종식과 유럽(ec)통합,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 등 우리를 둘러싼 국제환경이 급속히 변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눈을 돌려야 합니다. 새로운 국제변화를 능동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과거를 청산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정리=송양민-김창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