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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의 전방위 제재에 '경제요새' 전략 안통해

미국과 유럽은 물론, 일본과 한국 등 전 세계 민주주의 진영이 동참한 전방위적 경제 제재로 러시아 경제가 붕괴 위기에 몰리고 있다. 이른바 '경제 요새화'로 서방의 장기적 경제 제재를 버틸 준비가 되었다는 기존의 예상이 깨질 가능성이 커졌다. 서방의 경제 제재가 예상보다 강력하게 이뤄지면서 러시아 금융시장은 작동 불능 상태에 빠졌다. 8일(현지 시각)에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러시아 외화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원유 금수 조치까지 발표하면서, 산업계와 서민 경제까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러시아 루블화는 이날 외환시장에서 1달러당 140루블 선에 거래됐다. 한 달 전인 지난달 8일 1달러당 75루블보다 무려 87%나 환율이 올랐다. 루블화 가치가 거의 반 토막이 난 것이다. 러시아 주식시장은 지난달 26일부터 아예 문을 닫은 상태다. 서방의 경제 제재가 본격화하면서 주요 은행에 대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퇴출까지 이뤄지자, 외국인 투자자들의 '자산 투매'가 벌어진 데 따른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지난 28일부터 러시아 내 외화 유출을 막는 대통령령을 잇따라 발표하고, 루블화에 대한 무제한 공급을 선언했으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 특히 러시아 중앙은행의 대외 자산을 동결한 제재 조치가 러시아에 결정타를 날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뉴욕타임스 등은 당초 "러시아가 6310억달러(약 779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외화 자산을 확보하고 경제의 대외 취약성을 줄이는 이른바 '경제 요새화'를 추구해 서방의 경제 제재가 이어지더라도 큰 문제를 겪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러시아가 보유한 외화 자산 대부분이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인 것으로 밝혀졌다. 자산 동결 조치가 내려진 미국과 영국, 유럽 등 해외 선진국의 금융기관에 예치된 탓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실제로 갖고 있는 외화 현금은 전체 외화 자산(외환 보유고)의 1.9%인 120억달러(약 14조8000억원)에 불과하다. 비자와 마스터카드 등 주요 카드사와 페이팔, 애플 페이(미국 애플) 등 전자 결제 업체들마저 서비스를 중단하면서 러시아 기업과 국민의 해외 거래는 사실상 끊길 위기에 몰렸다.

주요 물자의 수출입 자체가 어려워지면서, 러시아 내 물가는 연일 급등세다. 러시아의 한 수퍼마켓 체인에서 지난달 500g에 300루블이던 소시지는 400루블로 33%가량 올랐고, 50루블이던 식사용 빵은 60루블로 20%가량 올랐다. 의류와 가전제품 등 공산품 가격 역시 오르거나, 재고가 있어도 판매를 중단하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이케아와 자라, 도요타 등 해외 기업들이 잇따라 러시아 사업을 중단하면서 공급 부족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한 교민은 "사재기와 공급 부족 영향으로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다"고 했다. 지난 1998년 국가 부도에 따른 금융 위기로 주요 생필품 물가가 몇 주 만에 2~3배로 뛴 일이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대안을 모색하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국내 금융기관의 해외 자금 거래는 중국이 위안화 국제화를 위해 만든 '중국판 SWIFT'인 CIPS를 활용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또 비자와 마스터카드 대신 중국 유니온 페이의 결제망을 활용하는 방법도 언급된다. 하지만 8일 러시아 원유 금수 조치 발표로 러시아의 마지막 현금원이던 에너지 수출마저 상당 부분이 막히면서, 러시아의 국가 부도 가능성은 더 높아지게 됐다. 러시아 국채의 부도 가능성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가격은 이미 지난 7일 41%포인트로 지난달 초 2%포인트에서 한달여 만에 20배 이상 급등한 상황이다.

러시아는 3월 중 약 7억달러(약 8650억원) 상당의 국채 만기가 돌아온다. JP모건은 "러시아가 이 중 16일이 만기인 1억1700만 달러의 채권 이자를 갚지 않고 디폴트(부도) 선언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서방의 금융 제재를 구실로 고의적 국가 부도를 내 전 세계 금융 시장에 혼란을 유발하는 '자해 전략'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픽] 러시아 외환 보유고 기고자 : 파리=정철환 특파원 뉴욕=정시행 특파원 최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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