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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남편들은 냉장고를 액체 저장고로 안다. 저녁엔 술을 꺼내려고 냉장고를 열고 아침엔 물을 마시려고 기웃거린다. 물론 라면에 넣을 달걀을 꺼낼 때도 있고 남은 밥을 데우려고 냉장고를 열 때도 있다. 아, 김치가 냉장고에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 정도가 전부다. 냉장고 나머지 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실 알 필요도 없다. 어쩌면 모르는 게 낫다.

낮잠도 다 자고 골프 중계도 끝난 휴일 오후, 지독히도 할 일 없는 남편들은 냉장고를 열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기 시작한다. 그러면 대개의 아내들 긴장 지수가 높아진다. 남편들은 딸기잼부터 슬라이스 치즈, 요거트·떡국떡·굴소스까지 죄 꺼내놓고 유통기한을 확인한다. 이건 유통기한 다 됐는데 거의 안 먹었네로 시작해 유통기한이 1년이나 지났는데 이런 건 왜 안 버리고 있어 하며 아내의 신경을 긁는다. 남편은 끝내 비닐봉지 안에서 체액을 흘리며 생을 마감한 대파와 애호박을 찾아낸다. 코를 틀어쥐고 그 봉지를 꺼낼 때 남편은 자신이 음식 쓰레기 배출 담당이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며 치를 떤다.

남편의 과학 수사 또는 냉장고 포렌식이 냉장실에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냉동실 문을 여는 순간 부부는 그날 따로 밥을 먹거나 각방 쓸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남편이 볼 때 냉동실은 온갖 비닐봉지들의 아비규환이다. 검은 봉지, 흰 봉지, 지퍼 달린 봉지에 둘둘 싸놓은 랩까지, 도대체 내용물이 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그 좁은 곳에서 영면해 있다. 남편은 제발 저런 것들 냉장고에 넣어두지 말고 싹 버리라고 호소한다. 냉동실 두 번 열었다간 울지도 모른다. 아내는 대꾸하지 않는다. 냉동실의 혼돈은 설명할 수 있는 범주에 있지 않다.

모든 비닐봉지는 각자의 사명을 띠고 냉동실로 들어갔다. 또 각자의 이유로 아직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냉동실은 먹고 남은 것들의 도피처요, 삼한 시대의 소도 같은 곳이다. 그것을 넣은 자만이 꺼낼 수 있다. 냉동실은 냉장고에서 생수나 꺼내 마시는 남편들이 함부로 여닫는 데가 아니다. 그렇기에 아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그만 좀 해밖에 없다. 할 일 없으면 잠이나 더 자지 왜 부엌에 와서 난리야 같은 후렴구가 붙을 때도 있다.

남편들아, 냉장고 함부로 열지 마라. 그것은 군대 관물대나 자동차 트렁크처럼 정리되지 않는다. 그 카오스 속에서 잡채도 나오고 찌개도 나오고 부침개도 나온다. 모든 냉장고에는 반드시 유통기한 지난 음식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봉지들이 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살림의 시작이다. 기고자 : 한현우 기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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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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