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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행운아다. 시골에서 농사짓다 엄니 몰래 야반도주해 농약 가게 차린 것이 대박이 났다. 뻥 좀 치자면, 돈 세다 날 새곤 했단다. 그 돈으로 시골 전답을 샀다. B씨도 행운아다. 비닐하우스 세워 고추 농사 지었는데 때마침 농산물 수출 바람이 불며 전량 일본으로 보냈다. 그 돈으로 도시 건물을 샀다. C씨는 탕아(蕩兒)다. 새파랄 때 큰돈 만진 것이 화근이었다. 멋진 오토바이 사서 질주하다 대형 사고를 냈다. 목숨은 건져 다행. 병원비와 배상금으로 재산을 거반 날렸다.

D씨는 불운아다. 지지리 복도 없는 양반이다. 다시 일어서 보겠다고 좌충우돌 덤볐지만 하는 일마다 고객 대신 사기꾼이 몰렸다. 세상엔 친구 뒤통수치는 인간이 왜 그리 많은지…. 천만다행으로, 아내가 자존심 버리고 떡볶이 집 차렸는데 장사가 잘됐다. 믿을 건 조강지처뿐! E씨는 풍운아다. 작은 식당 크게 확장하고, 더 크게 확장하다, 나중엔 큰 갈빗집 사장이 됐다. 돈 좀 손에 쥐자 (자신과는 한 줄기 인연도 없는) S대에 후원금 쾌척하고 최고경영자 과정도 수료했다. 식당 카운터 옆에 걸린 'S대 동문의 집' 현판을 매일매일 번쩍번쩍 닦는다.

이미 눈치챈 독자도 많겠지만 A, B, C, D, E는 동일인이다. 우리 아버지다. 사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F, G, H… 플롯은 이어진다. 소설책 한 권쯤 써야 마땅하다. 인생은 16부작 드라마와 같아, 전체로 한 드라마지만, 각 단편으로도 이야기가 된다. 2편 보다 건너뛰고 5편 봐도 줄거리가 얼추 연결된다. 시즌1은 망했어도 시즌2 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릴 적 나는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천방지축 아버지와 달리 나는 집에서 책만 읽는 범생이였고, 사업가 기질은 장난꾸러기 둘째가 물려받은 것 같다고 친척 어르신들은 입을 모았다. 아버지가 E씨쯤 되던 나이에 우리가 닿고 보니, 종작없는 호기심 덩어리 유전자는 내가 계승한 것이 확실하고, 동생은 대학 교직원으로 조신하게 사는 중이다.

지금은 편의점을 운영하지만 과거에 나는 오만 짓을 다 했는데 그중 하나가 미용실이다. 미용사도 아니면서 미용실을 차렸다고 하면 '세상에 그런 일이!' 하며 모두 놀란다. 그것도 우리나라가 아니라 중국에서 미용실을 차렸다고 하면 연구 대상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미용실을 하나만 아니라 세 곳까지 차려봤다. 그전에는 식당을 하다 쫄딱 망한 적도 있고 (그것도 중국에서!) 화장품 장사를 하겠다고 깝죽대다 거꾸러져 3년 동안 똑같은 화장품을 밤낮으로 온몸에 처바른 적도 있다. 덕분에 피부는 고와졌다.

언젠가 아버지는 캡슐 안에 사람이 들어가 고기도 먹고, 자동으로 반찬 보충하고, 불판 갈아주고, 나중엔 그곳이 노래방으로 바뀌고, 영화도 볼 수 있는 신개념 장치를 개발하겠다고 깨작깨작 설계도 그리고 적잖은 제작비를 투입했다. 그즈음 나는 편의점 상품을 배달하는 혁신적 플랫폼을 운영하겠다고 전문 업체에 개발 맡기고 1인 회사까지 차렸다. 아버지는 '캡슐 식당'으로 전 세계 외식 업계를 평정하겠노라며 호탕하게 웃었고, 나는 편의점 배달 시장을 석권해 내년쯤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닐 거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물론 둘 다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핏줄은 못 속인다.

아버지의 F씨, G씨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나중에 아버지는 시골 밭을 구입해 거기서 온갖 농사 다 지었다. 손바닥만 한 뙈기밭에 오이, 고추, 감자, 대파, 옥수수…. 욕심은 많아 뭘 그리 오밀조밀 심었는지, 토끼와 닭까지 키우고, 작은 농장을 만들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은 또 설계도를 그리고 계셨다. 농촌 테마 카페를 만들겠다나. 앞으로는 이런 교외 카페가 유행할 거라고 큰소리치셨다.

그러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이어졌다. 갑작스레 중고 승합차를 몇 대 구입해 뚝딱뚝딱 두세 대쯤 개조하셨다. 앞으로 캠핑카 시대가 열리게 될 거라나. 그러다 불쑥 미국으로 날아가셨다. 이번에는 K푸드 바람이 불 거라며, 미국 텍사스에 '코리안 정통 갈빗집'을 만들어 재기 발판으로 삼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밝혔다. 참고로, 울 아버지는 올해 칠십 되셨다. 그럼에도 여전히 팔뚝은 튼튼하고, 꿈도 도전도 허풍도 여전하다. 오늘도 열심히 설계도를 그린다. 뭔가 계속 그릴 줄 아는 용기는 얼마나 소중한가.

돌아보면 나는 요새 너무 힘들어 자꾸 주저앉고만 싶은데 아직도 끊임없이 뭔가 벌이시는 아버지를 보며 이상한(?) 용기를 얻는다. 정초에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월급쟁이 때려치우고 사업이나 해볼까 푸념한다. 동생아, 아버지 닮은 자식은 형 하나로 족하단다. (워워, 릴렉스!) 다시 일어서야 할 2022년이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얼마나 대단한가. 백지에 또 무엇을 그릴지 아무도 모른다. 기고자 : 봉달호 작가·'오늘도 지킵니다, 편의점' 저자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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