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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함께 씩씩해지자＂… 교실이 따뜻해졌다

지난가을의 일이다. 국어 시간에 책 몇 권을 아이들에게 추천하면서 저자 소개를 아울러 했다. 아이들이 유독 관심을 표현하는 작가가 있었다. '예민해도 괜찮아'를 쓴 이은의 작가였다. 여러 학생이 "이은의 작가님이 멋있는 사람일 거 같아요"라며 만나고 싶어 했다.

이은의 작가는 직장 내 성희롱을 당하고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서 4년 만에 승소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연스럽게 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로스쿨에 입학했다. 편안하지 못했을 소송 기간이 그만의 경력이 되어서 현재는 성범죄 관련 사건을 주로 맡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언젠가 작가의 소셜미디어에서 삼척을 '끝없이 다정한 곳'이라 표현한 구절을 본 기억이 났다. 이 외진 고장까지 초대하기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연락을 해보았다. 작가는 "삼척이어서, 삼척의 여고생을 만나는 자리여서" 가겠다는 답을 보내왔다. '다정한 삼척' 덕분에 성사된 만남이었다.

스무 명이 참여하는 아담한 규모로 만남을 준비했다. 교실은 대체로 무미건조한 공간이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무람없지는 않을까 걱정했더니 교실을 조금 꾸미자고 아이들이 제안했다. 1학년 예빈이, 초현이와 함께 삼척 시장에서 가장 큰 문구점에 갔다. 아이들에게 "작가님을 만나는 자리가 크리스마스 파티 같으면 좋겠어" 했더니 말귀를 알아들은 아이들이 몇 가지를 골라왔다. 책상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자그마한 크리스마스 트리, 교실 유리에 붙일 성탄절 스티커, 문에 거는 손바닥만 한 장식을 샀다. 여기에 발표할 아이들이 사용할 금색 마이크(소리는 안 난다), 루돌프 뿔이 달린 빨간 머리띠도 함께 구매했다.

이은의 작가가 왔다.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다양한 경험이 압축된 세계를 머리에 구름처럼 이고 왔다. 아이들이 강의를 들을 때 나는 교실 한편 구석에 조용히 서 있었다. 혹시 딴짓을 하는 아이들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미심쩍은 마음' 때문이었다. 강의는 한 시간 동안 이어졌고 나는 뜻밖에도 비밀스러운 모습을 보았다. 아이들은 완벽하게 몰입한 얼굴이었다. 이야기에 쏙 빠진 눈빛이었다. 스무 명의 아이들 모두 미동도 없이 강의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란 이야기를 듣는 존재가 아닌가. 누구나 이야기를 하고 들으면서 자란다. 어른이 된 인간의 몸과 영혼을 분석해본다면 켜켜이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강의가 끝나고, 사인을 받으며 아이들이 작가님 귀에 뭐라 속삭인다. 궁금해 가까이 가서 들으니 이런 말이었다. "변호사님, 제 이름 옆에 하트 하나만 그려주세요." "작가님, 공부 열심히 하라 써주세요." 아이들은 이런 부탁을 하고 있었고 작가는 어린 독자들의 요청을 들어주느라 하트를 그리고, "꼭 꿈을 이루세요" 같은 말들을 부지런히 쓰고 있었다. 긴 시간이 필요한 저자 사인회였다. 저자 사인이 아니라 부적을 만들어 주는 시간 같았다. 꾹꾹 눌러 쓴 글씨에 씩씩하게 살라는 응원을 담은, 삶의 부적 말이다.

아이들은 먼 곳에서 온 손님에게 낯선 세계의 이야기를 들었다. 열정으로 삶을 밀고 나가 자기의 길을 만드는 이의 이야기였다. 1학년 은세는 수줍게 소감을 말했다. "자신에게 무엇이 유리한가보다 무엇이 유익한가를 고민하라는 이야기, 또 사람의 삶은 어떻게든 이어지게 마련이니 우리는 서로 연대해야 한다는 작가님의 말이 마음에 남았어요. 앞으로 제 신념으로 삼으려고요." 이 말이 은세를 지켜주지 않을까. 자신의 유리함을 챙기며 앞만 보고 달리는 어른들의 각박한 세계에 던져졌을 때 이 말이 은세를 지키고, 은세를 살렸으면 좋겠다. 나 또한 이 말에 마음을 기대어 사사로운 이로움보다 공공의 이익을 궁리하는 길을 걷고 싶다.

이날 교실에 흐르고 넘친 이야기들은 아이들의 귀로 뇌로 그리고 심장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문득 알고 싶어졌다. 아이들의 몸에 깃든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무엇으로 화(化)하는 걸까. 아이들의 핏줄에 스민 이야기는 온몸을 씽씽 돌지 않으려나. 이야기가 손가락과 발가락 끝의 신경을 모조리 툭툭 건드려 잠든 마음을 깨우지 않으려나. 이야기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어 곁의 사람을 지키고 안아주는 시발(始發)의 공간이 교실이라 믿는다. 기고자 : 서현숙 '소년을 읽다' 저자·삼척여고 국어 교사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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