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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살인·성범죄… 지옥 같은 법정에도 꽃은 핍니다

희망이 있으면 버틸 수 있다. 2021 조선일보 올해의 저자인 박주영 부장판사와 '올해의 책' 저자인 서현숙 삼척여고 교사, 그리고 농구의 길을 떠나 산업 현장에서 새 인생을 개척 중인 최희암 전 연세대 농구감독이 신년 에세이를 보내왔다.

갈등은 분쟁을 낳고, 분쟁은 폭력을 낳는다. 법정은 분쟁의 종착지이자, 폭력의 역사가 기록되는 곳이다. 이 난장의 한가운데서 끊임없이 사람을 의심하고 단죄하며,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늘 품고 사는 판사는 결코 고상하거나 마음 편한 직업이 아니다. 특히 형사법정은 온갖 종류의 탐욕과 악이 흘러드는 곳이다. 형사합의 재판을 하며 나는 매주 살인자와 강간범과 마약사범과 사기꾼을 만났다. 합의 사건의 절반을 차지하는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 상당수는 아동·청소년이고, 가해자의 상당수는 친부나 계부였다. 20대 젊은이들이 가출 청소년들에게 성매매를 강요하고 화대를 갈취했으며, 누군가의 전 재산을 편취하는 데도 10분이면 충분했다. 한때는 애인으로 불렸던 사람에게 맞거나 찔려 죽은 여성들의 울음은 그칠 날이 없었고, 부모가 아이를 살해하고, 헐값에 대기업의 위험을 떠안은 하청 업체 노동자들이 떨어지고 끼이고 잘렸다는 소식 역시 멈출 줄 몰랐다. 형사법정은 가해와 피해, 선과 악이 뒤섞인 채, 분노와 슬픔으로 뿔럭뿔럭 끓어올랐다.

형사재판을 다룬 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어김없이 하는 질문이 있다. "이 끔찍한 곳에 있으면서 어떻게 희망을 얘기할 수 있죠?"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해피엔딩이나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영화나 소설을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화장실 벽에 붙은 아포리즘에도 기겁하는 냉소적인 인간이다. 이런 내가 왜 사람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를 기억하며 산 자를 재판한 날이었다. 평소처럼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문득, 이런 비극적인 사건의 결말치고 너무 어이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판결문에 드러나지 않은 그 수많은 서사와 맥락이 정말 징역 몇 년의 선고로 끝난단 말인가? 이 재판으로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말할 수 없이 허무하고 우울해졌다. 정의와 선을 언급하는 것이 무람하다 못해 식상해져 버린 법정의 클리셰가 너무 지겹고 두려웠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형사법정의 내가 믿는다면 모두가 믿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나는 숭고한 인간애 때문이 아니라, 지겨워 견딜 수 없어서 희망을 떠올린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한들 형사재판장은 형벌 말고 별다른 수단이 없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 보면 한마디 말과 작은 선의에 삶의 궤적이 바뀌는 경우가 있기에, 나는 법정에서 말과 글로 안간힘을 썼고, 그 노력에 대한 응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들과 노모의 호소에도 출소 후 다시 마약을 손댄 자신에게 실망해 자살하려고 진정제를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었다가 실패하고, 내 재판을 받은 마약중독자가 있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책에 썼고, 그 책을 읽은 그가 출소한 다음 편지를 보내왔다.

"수많은 죄인 중에서도 저를 믿어주시며 단약(斷藥) 할 수 있다고 하신 판사님의 말씀이 저를 새로운 사람으로 일어설 수 있게 했습니다. 판사님께서 믿어주셨기에 생이 다할 때까지 꼭 그 믿음을 지켜가는 삶을 살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믿음이란,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요. 저는 세상에서 판사님을 가장 존경합니다."

이 편지에 대한 답신을 다시 책에 실었다. "편지 덕분에 판사 노릇 한 게 참 기뻤습니다. 선생의 편지는 판결 기계가 되어가는 제 단약(單弱)한 의지마저 다잡아 주셨습니다. 남은 판사 생활도 정신 바짝 차리겠습니다. 저도 선생을 존경합니다."

소설 속 행복과 희망은 여전히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따분한 해피엔딩이란 없다는 것을 형사법정에서 깨달았다. 실화는 무조건 행복하게 끝나야 한다. 우리가 작은 미담에도 크게 위로받는 이유도 실화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사랑의 실화는 실로 강력하다. 현존하는 사랑은 세상의 모든 클리셰를 깨부순다. 기고자 : 박주영 부산지법 동부지원 부장판사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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