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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당선작

등장인물

이 씨 40대 남자
김 씨 30대 남자

때

깊은 밤.

장소

어느 산.

정장 차림의 김 씨와 어두운 옷차림의 이 씨가 숲을 헤치고 나온다.

김 씨는 삽을 들고 있고 이 씨는 장우산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다.

이 씨 : (고통스러운 듯 주저앉으며) 아이고, 좀 쉬었다가 가시죠.

김 씨 :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이 씨 : 아니요. 산에 너무 오랜만에 왔더니 힘드네요.

김 씨 : 그러시군요. 다 왔습니다.

이 씨 : 여기군요.

김 씨 :(둘러보며)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이 씨 : 여기서 뭘 하시려는 겁니까.

김 씨 : 그건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씨 : 올라오느라 옷에 흙이 잔뜩 묻었네요. 비싸 보이는데.

김 씨 : (옷을 털며) 어머니께서 사주신 거예요.

이 씨 : 촤르륵 휘감기는 게 명품인가 봅니다.

김 씨 : 기죽지 말라고 좋은 걸 사주셨습니다. 첫 출근 때 입으라구요. 구두랑 같이요. 벌써 그게 작년 이맘때 얘기네요.

이 씨 : 그런 옷을 왜….

김 씨 :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싶었습니다.

이 씨 : 어째서죠?

김 씨 : 그냥요. (사이) 그냥.

사이.

김 씨 :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이 씨 : 저는 뭘 하면 됩니까?

김 씨 : 사람 죽이는 일 아니면 다 하신다고 하셨죠?

이 씨 : 예. 뭐.

김 씨 : 이제부터 제가 땅을 팔 겁니다.

이 씨 : 땅을… 요?

김 씨 : 제가 땅을 파는 동안 제 얘기도 들어주시고 부탁도 들어주시고 그냥 옆에 계셔주면 됩니다. 아 물론 쉬셔도 되구요.

이 씨 : 땅은 왜.

김 씨 : 다 파고 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씨, 우산을 꼭 쥔다.

김 씨 : 걱정 마세요. 선생님을 공격하거나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 힘든 일도 아니구요.

이 씨 : 힘든 일도 아닌데 돈을 그렇게 많이 주시는 이유가….

김 씨 : 힘들진 않지만… 결코 많은 돈은 아닐 겁니다. 먼저 드린 계약금 삼십 빼고 약속한 돈 백칠십만 원은 일이 끝나면 즉시 드리겠습니다.

이 씨 : 점점 미궁이군요.

김 씨 : 금방 끝날 겁니다. 자명한 일이구요.

김 씨, 적당한 곳을 찾더니 땅을 파기 시작한다.

이 씨, 얼떨떨한 모습으로 앉을 곳을 찾는다.

이 씨 : (쪼그리고 앉아서 지켜보다가) 거기 뭐가 묻혀 있습니까?

김 씨 : 이제부터 질문은 되도록 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씨 : 아… 예. 땅을 얼마나 파실지도 물어보면 안 됩니까.

김 씨 : (허리쯤을 가리키며) 아마 이 정도요.

김 씨, 다시 땅을 파기 시작한다.

이 씨 : 아… 그 정도 깊이면… 아무래도.

김 씨 : 아무래도?

이 씨 : 오래 걸리겠네요.

김 씨 : 금방 하지 않을까요?

사이.

이 씨 : 군대 갔다 오셨나요?

김 씨 : 아뇨. 공부만 하다 보니 목 디스크가 심하게 와서요. 팔을 못 움직일 정도였거든요.

이 씨 : 아… 어쩐지.

김 씨 : 티가 나나요?

이 씨 : 그렇게 마구잡이로 파면 안 되거든요. 제가 시범을 좀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김 씨 : 그러시죠.

이 씨, 삽을 받아들고 우산을 김 씨에게 건넨다.

김 씨 : 오늘 비 온다고 했습니까?

이 씨 : 아뇨. 이 산에 멧돼지가 출몰한답니다.

김 씨 : 아. 그래요? 우산으로 멧돼지를 때려잡으시려구요?

이 씨 : 멧돼지가 나타나면 우산을 쫙 펴고 그 뒤에 숨을 겁니다.

김 씨 : 아….

이 씨 : 그놈이 시력이 별로 좋지 않아서 우산을 펼치면 바위나 거대한 짐승 같은 건 줄 안대요. 그래서 그냥 지나가거나 피해 간답니다.

김 씨 : 그게… 말이 되나요?

이 씨 : 혹시 모르죠. 하지만 도망치면 죽는 건 확실합니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김 씨 : (걱정스럽게) 이게 멧돼지 소린가요?

이 씨 : 모르겠네요. 어쨌든 서둘러야겠습니다.

김 씨 : 예.

이 씨 : 잘 보세요. 삽을 이렇게 수직으로 꽂아서 밟아야 합니다. 그리고 팔 힘으로 흙을 퍼내는 게 아니라 지렛대의 원리로 흙을 떠내듯이. 꽂고, 밟고, 뜨고. 꽂고 밟고 뜨고.

김 씨 : 꽂고, 밟고, 뜨고.

이 씨 : 이렇게 하다가 폭을 넓힐 때는 삽을 뒤집어서 흙을 파내야 합니다. 그리고 바닥에서 지면까지 경사를 45도 정도로 만들면서 파야 돼요. 안 그러면 못 나가니까요.

김 씨 : 아… 전문가시네요.

이 씨 : 해 보세요.

김 씨, 땅을 판다. 아까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버겁고 서툴러 보인다.

김 씨 : 꽂고, 밟고, 뜨고 이렇게요?

이 씨 : 예 예.

김 씨 : 한결 수월한 것 같기도 하네요.

이 씨 : (조금 지켜보다가) 사는 게 마음대로 안 되죠?

김 씨 : 예.

이 씨 : 조금 더 잘하는 제가 하는 게 어떨까요? 그냥 앉아서 돈만 받기도 그렇네요.

김 씨 : 답답하신가 보네요.

이 씨 :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김 씨 : 아… 그러면 안 되는데.

이 씨 : 힘들면 교대하면 되니까요. 번갈아 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김 씨 : 그럼 언제든 힘들면 말씀하세요.

이 씨 : 대신 멧돼지가 나타났다 싶으면 당황하지 말고 우산을 재빨리 펼쳐야 됩니다.

김 씨 : (우산을 받아 들고) 예예.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이 씨, 삽을 받아 들고 김 씨 대신 땅을 파기 시작한다.

김 씨 : 땅 파는 것도 제대로 못하네요 저는.

이 씨 : 처음엔 다 그렇죠. 땅 잘 판다고 뭐 대단한가요.

김 씨 : 인생이 한마디로 삽질이었거든요.

이 씨 : 공부만 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김 씨 : 그렇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명문대를 나온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이 씨 : 못 믿기는요. 그럴 것 같았어요. 부모님이 아주 기대가 크셨겠네요.

김 씨 : 과거가 높고 환할수록 오늘의 바닥은 깊고 어둡죠.

이 씨 : 무슨 공부를 하셨길래.

김 씨 : 공시생 10년 차예요. 행시를 준비하다가 7급으로 목표를 바꿨습니 다. 낙오자가 되는 것 같았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해야 했습니다.

이 씨 : 7급도 대단하죠.

김 씨 : 하지만 그마저도 저는 해내지 못했습니다. 포기하지도 못했습니다. 10년이 넘도록요. 결국 저는 부모님의 기대와 실망을 못 견디고 작년에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양복까지 선물 받은 겁니다.

이 씨 : 걷잡을 수 없게 되었군요.

김 씨 : 부모님은 제가 법무부 소속 공무원인 줄 아십니다. 어머니는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제 자리와 사무실 풍경 사진 좀 보내달라구요. 친구분들께 돌리고 싶다고 명함 나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저는 견디다 못해 기밀 업무를 해야 해서 신분 노출을 할 수 없다고 허무맹랑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씨 : 믿으시던가요.

김 씨 : 마음 아프게도 그걸 믿으시더라구요.

이 씨 : 그래도 한숨 돌렸네요

김 씨 : 매일 정장을 입고 도서관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일 년만 더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꼭 해내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너무 아깝게 떨어졌거든요. 대출도 받아야 했습니다. 공부하는 데는 돈이 많이 듭니다. 취직을 했으니 부모님께 용돈도 드려야 했구요. 이자가 무서웠지만 합격만 하고 나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씨 : 어떤 결과를 내든 부모님은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김 씨 : 수습할 기회가 있지 않았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이 씨 : 이를테면요.

김 씨 :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엔 부모님의 기쁨이 너무 컸으니까요. 저희 집 가훈이 뭔지 아십니까? 결과로 말하자, 예요.

이 씨 : 박력 있네요.

김 씨 : 아버지가 군인 출신이시거든요. 그런 아버지가, 제가 합격했다고 말씀드렸을 때, 떨리는 목소리로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일가친척을 모두 불러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모 아들이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부터 어머니는 우울증약을 드시기 시작했습니다. 제 합격 소식을 들은 후에야 우울증약을 끊으셨습니다.

이 씨 : 그렇군요. 시험에 떨어졌어도 취업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김 씨 : 저는 행정고시, 7급에 이어 최종적으로 9급 공무원 시험에도 떨어졌습니다. 9급 공무원 시험 합격자 발표 날 명단에 제발 내가 있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라는 저의 모습을 보았을 땐 정말 뭐라 말할 수 없는 열패감이 느껴지더군요.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기도 싫어졌습니다. 저는 그냥 낙오자가 된 겁니다.

이 씨 : 이해합니다.

김 씨 :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이제는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이 씨 : 그냥 그렇게라도 살다 보면 살아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김 씨 : 아니요! 죽음만이 제가 안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없습니다. 위로가 힘이 되는 사람은 따로 있겠지요. 저는 아닙니다. 저는 이미 벼랑 끝에서 두 발을 뗀 사람이거든요. 떨어지는 일만 남았는데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저 편히 잠들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이 씨 : 벼랑 아래에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김 씨 : 기대가 클수록 충격도 크지 않겠습니까.

이 씨 : 기적과 기대는 다른 겁니다. 기적은 안 일어나도 그만인 거니까요. 복권을 사는 마음 같은 거요. 밑져야 본전이죠.

김 씨 :저는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사이.

이 씨 : 그런데… 땅은 왜 파는 겁니까?

김 씨 : 사라지고 싶어서요. 흔적 없이.

이 씨 : ….

김 씨 : 유난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건물 옥상이나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거나 모텔에 들어가 목을 매면 간단할 텐데 말이에요. 그렇게 죽는 게 무서워서 못 한 게 아닙니다. 저는 저의 죽음이 사건이 되어 기사가 될까 봐, 사람들이 그게 나인 것을 알까 봐 두렵습니다. 명문대를 가고 행시를 준비한다고 뻐기더니 결국 그렇게 되었다고 비웃고 자신의 불행에 위안 삼으면서 나와 내 부모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의 입에 올려질 것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C10면에 계속 기고자 : 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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